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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달진미술연구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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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의 현대미술 바로잡는 김달진

관리자





어느 한 분야에서 자신만의 영역을 구축해가며 ‘전문가’로 불리워지는 것은 여간 어려운 일이 아니다. 그만큼 연륜과 피나는 노력이 요구되기 때문이다. <일요시사>는 자신만의 전문성을 바탕으로 확고부동한 위치를 쌓으며 미개척분야를 개발하고 발굴해내 사회에 공헌을 하고 있는 각 분야의 전문가를 릴레이 인터뷰하고 있다. 이번 호에서는 최근 김달진 미술연구소를 개설하고 서울아트가이드를 창간하며 미술 자료 전문가로서 바쁜 하루하루를 보내고 있는 김달진 소장(47)을 만나보았다.


김달진 소장이 ‘걸어 다니는 미술자료실’이라는 별명을 얻을만큼 방대한 양의 자료를 모을 수 있었던 이유는 타고난 수집벽 때문이었다. 55년 충복 옥천 태생인 김 소장은 11살의 어린 나이에 어머니가 돌아가신 후 점차 내성적으로 변해갔고 점차 수집광이 되어갔다. 우표, 담뱃갑, 상표 등을 모으는 재미로 중학교 3년을 보낸 김 소장은 고등학교에 들어가면서 주부생활, 여원 등의 여성지에서 소개된 외국의 명화들을 모으기 시작했다.

그렇게 그림에 대한 관심을 갖기 시작한 김 소장은 어느 덧 미술 관련 서적들도 한두권씩 보게 되었고 어느덧 서양 미술사의 흐름을 파악해 가기 시작했다.
하지만 한창 서양화에 빠져있던 김 소장은 지난 72년 경복궁에서 열린 한국근대미술 60년전을 관람하면서 인생의 목표를 설계하게 됐다.
“이 전시회를 보면서 한국미술에도 관심을 갖기 시작했다. 그래서 더욱 많은 자료를 찾아보려 했지만 몇몇 유명작가들을 제외하고는 기록이 너무 빈약하다는 것을 느끼고, 그 일을 직업 삼아 제대로 하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목표를 세운 김 소장은 주저할 시간이 없었다. 몇년간 온갖 잡지와 신문에서 곱게 오려모아 켄트지에 정리한 자료를 철끈으로 묶어 15권으로 정리해서 보따리 하나를 만든 김 소장은 당시 홍익대 박물관장이었던 이경성씨를 찾아가 큰절을 올리고 자신의 자료들을 보여줬다. 물론 고등학생의 이런 열정이 놀라운 것은 사실이었으나 당장 같이 일을 하자고 할 수는 없는 법, 하지만 이 관장은 그의 이름을 가슴 깊숙이 새겨두었다.

고교 졸업과 동시에 그는 화랑이나 미술 관련 잡지사들에 편지를 보내며 자신을 소개했지만 결과는 무응답의 연속이었다. 결국 군입대를 선택했고 제대후에야 겨우 월간 <전시계>에 사환급 기자로 들어갈 수 있었다. <전시계>는 미술잡지도 예술잡지도 아닌 생활정보지였지만 그에게는 최초의 기회가 온 것이었다. 헌책방 대신 화랑들을 돌아다니며 온갖 전시소식을 실었고 내용을 자세히 소개했다. 때로는 주관적인 평가까지 끼워넣어 문제가 되기도 했다.
하지만 80년 군사정권의 언론계 회오리에 결국 <전시계>는 문을 닫았고 그 역시 오갈데 없는 신세가 되어버렸다.

청주로 내려간 김 소장은 레스토랑을 경영하는 누나의 일을 거들며 하루하루를 소일하고 있을 때 81년 대통령령으로 국립현대미술관장이 행정직에서 전문직 인사로 교체되는 일대 사건이 일어났다. 전문직 1호 관장은 고교시절 그에게 기회를 보자고 말해줬던 이경성 홍익대 박물관장이었던 것.
결국 그는 81년 9월 덕수궁에 있었던 국립 현대미술관에 일당 4천5백원의 일용잡급 임시직으로 입사할 수 있었다. 전시과에 소속된 그는 평소 자신의 소망처럼 미술관의 온갖 자료를 하나씩 분류하고 정리하는 일을 그때서야 할 수 있게 되었다. 87년이 되어서야 정식 발령을 받은 그는 96년까지 15년간의 국립현대미술관 자료실에서 근무할 수 있었다. 금요일만 되면 커다란 보따리를 둘러메고 서울 각지의 화랑을 직접 돌아다니며 작품 감상과 팜플렛 수집을 시작했고 매주 전시장 도록과 전시된 작품을 하나하나 비교하기 시작했다.


이후 좀더 체계적인 미술공부를 위해 성균관대 사서교육원, 서울산업대 금속공예과, 중앙대 예술대학원 문화예술학과를 다니며 주경야독했다. 이런 그의 노력은 결국 지난 95년 <바로보는 한국의 현대미술>이라는 500여 페이지에 달하는 책을 만들 수 있게 해 주었다. 이 책에는 작가, 평론가, 단체, 화랑, 국내외 전시회 등 한국미술계의 모든 것이 담겨있다.

김 소장이 미술계에 이름을 날리게 된 이유는 사실 다른 곳에 있다. 그것은 바로 그의 날카로운 비판정신이었다. 물론 우리 문화계에 기록이 엉성한 분야가 미술계뿐만은 아니지만 미술계는 김달진이라는 한명의 과객 때문에 매번 혼줄이 나야했다. 국립현대미술관이나 예술의 전당 등의 잘못된 기록을 꼬집어 내는 것은 물론이고 문화연감의 오류까지 지적해내며 공공문화기관들의 권위를 사정없이 흔들었다.
“잘못된 부분을 지적하고 바로잡는 일을 하다보니 여기저기서 욕을 많이 먹는다. 때론 편집광적이라는 소리도 듣고 ‘두고 보자’는 협박 비슷한 말을 듣기도 한다. 하지만 ‘꼭 해야 할 일을 하고 있다’는 격려를 보내주시는 분들이 훨씬 더 많다“


정확히 14년2개월 동안 국립 현대미술관에서 근무한 김 소장은 그때까지도 10급 말단직을 벗어날 수 없었다. 결국 경제적인 부담감으로 인해 가나아트센터 자료실장으로 자리를 옮긴 그는 자신의 일을 계속했다. 이때가 지난 96년으로 이때부터 또 다른 의미있는 일을 시작했다. 그것은 바로 전시회 정보를 담은 8면짜리 소식지를 발행하기 시작한 것. 인사동 청담동 사간동 동숭동 등 서울시내 화랑지역을 7개로 구분해 지도와 함께 자세하게 실어준 이 소식지는 화랑의 위치와 전시회가 빠짐없이 실려있는 미술계 게시판 역할을 충실히 했다. 처음에는 프랑스의 전시회 정보 소식지를 샘플링해서 만들기 시작한 <서울전시회가이드>는 가나아트센터에서 총 40호까지 나왔다.

41호부터는 이름을 <서울아트가이드>로 바뀌어 재창간호가 되었는데 이제는 그가 지난해 설립한 김달진 미술연구소에서 만들고 있다. 지금까지는 정보가 대부분을 차지하고 있었지만 재창간된 <서울아트가이드>에는 이경성 전 국립현대미술관장의 <이경성 칼럼>이 연재되고 과거를 통해 현재를 보는 <미술역사 속의 오늘> <이 한 점의 자료> <미술살롱> 등이 수록된다.
미술자료 안내, 미술컨설팅 등의 활동 등의 차후 활동 계획을 준비중인 김 원장은 일반인들의 우리 미술에 대한 애정과 전시회에 대한 따스한 관심을 부탁했다.


신민섭 기자

- 일요시사 2002. 1. 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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