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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미술에 없어선 안될 '아름다운 괴짜' 김달진

관리자

한국 미술에 없어선 안될 '아름다운 괴짜' 김달진

고졸에 국립미술관 일용직 등 밑바닥에서부터 미술계 새로운 역사 되기까지

'김달진미술연구소'의 김달진(55) 소장은 괴짜다. 미술을 좋아해 중고등학교때부터 지금까지 미술에 관한 것이라면 닥치는대로 모았다. 오죽하면 '걸어다니는 미술자료'라는 별명이 붙었을까. 그는 미술 자료 보존에 대한 개념이 없었던 미술계에 자료의 체계를 만들고 수많은 통계와 분석을 남겼다. 국가가 해야할 방대한 자료작업을 한 개인이 해낸 것이다.

고졸 출신에 정규 미술교육이라곤 받아본 적도 없고, 국립현대미술관 일용직 출신인 그는 지금의 성공을 이루기까지 말못할 설움과 홀대를 겪기도 했다고.

하지만 지금 그는 우리 미술계에서 없어서는 안될 존재로 자리매김하고 있다. 김달진은 단순한 괴짜가 아니라 이시대의 진정 아름다운 괴짜가 아닐까.

'아름다운 괴짜' 김달진 소장이 이번에는 미술관련 인사 4909명의 출생지, 학력, 전시경력 등 기초정부를 수록한 '대한민국 미술인 인명록 I'을 출간해 화제다.

문화체육관광부 지원으로 만든 이번 인명록에는 기존 미술연감 인명록에 빠져 있던 월북 및 납북 작가와 재외동포, 행방불명 미술인에 대한 정보도 꼼꼼히 수록돼 있어 눈길을 끈다.

최장수 미술인인 100세의 장발(1901~2001), 23세에 요절한 미술인 강신호(1904~27) 같은 이색 기록도 담았다. 공예, 서예, 디자인 등 미술관련 작가들은 물론 이론가들의 정보도 모았다.

그가 펴낸 '서울아트가이드'도 어느덧 지령 100호를 돌파했다. 작은 팜플렛으로 시작했던 '서울아트가이드'가 지금의 성과를 거둘 것이라고 예상했던 사람은 많지 않았다.

하지만 그의 열정과 발품을 팔아 얻어낸 전문적인 지식은 미술인들의 마음을 움직였고, 지금은 국립현대미술관, 리움미술관, 가나아트센터 등 메이저 전시관에서 일간지를 제치고 가장 먼저 광고를 싣는 미술잡지가 됐다.

그가 설립한 김달진미술자료박물관에는 36년간 수집해왔던 자료 중에서 사료적 가치가 큰 자료들이 체계적으로 보존, 전시돼 있다. 일제 강점기를 시작으로 출간됐던 미술잡지부터 각종 팸플릿, 개인 파일까지 방대한 미술자료들이 미술의 역사를 보여주며 일반인들에게 개방해 자료들을 공유하고 있다.

문화저널21은 미술계를 움직이는 '아름다운 괴짜' 김달진 소장을 만나 미술인명사전과 서울아트가이드를 발간한 계기와 앞으로의 계획 등에 대해 들어봤다.


ⓒ박현수기자

'대한민국 미술인명사전'을 발간하게 된 계기는.
인명사전은 갑자기 만들어야겠다고 생각해서 만들어진 것이 아니었다. 고등학교를 졸업한 후 미술잡지에서 근무하면서 1979년부터 미술인명사전을 만들기 시작해 지금에 이르른 것이다.

청계천 헌책방 골목을 이 잡듯이 뒤지며 근현대작가에 관한 것이라면 뭐든 좋았다. 신문 부음난에서 미술가들의 타계 날짜를 스크랩해 카드화, 목록화하기도 했다.

인명사전을 만들면서 어려웠던 점은.
유명하지 않은 작가의 경우 정보를 찾기 어려운 경우가 많았다. 하지만 유명작가만 싣는다면 의미가 없다고 생각했다. 2등별이 있어야 1등별이 빛나는 것이 아니겠는가. 또 같은 화가인데 누구는 묻혀져서 아예 존재자체가 없어진다는 것이 안타까웠다.

동년배 작가들과 유족에게 전화해서 물어보고, 기억 속에 남아 있는 것을 추적하고 또 추적해서 자료를 만드느라 시간이 오래 걸렸다. 또 누구를 싣고, 누구를 싣지 않아야 할지에 대해 기준을 정하기도 애매했다. 그래서 12명의 심의위원의 논의를 거치기도 했다.

인명사전을 만든 후 미술인들의 반응은.
어렵게 만들었지만 반응이 좋아 큰 보람을 느낀다. 많은 유족들이 '어떻게 기억을 하고 연락을 했느냐'며 기뻐했고, 재야작가와 월북작가, 재외작가 등 잊혀졌던 작가들을 폭넓게 수록하게 돼서 뿌듯하게 생각한다.

대학 졸업장 없이 미술계에서 성공하기까지 많은 어려움이 있었을텐데.
학연, 지연이 중요한 미술계에서 대학 졸업장이 없다는 것은 커다란 컴플렉스로 작용했던 것도 사실이다. 누구보다 전문적인 지식을 갖고 있었지만 번번히 승진에서 좌절을 당하는 등 불이익을 당해야 했다.

15년간 근무했던 국립현대미술관을 떠나게 된 것도 일한만큼 직급을 받지 못해서였다. 가슴 속의 응어리가 커져서 견딜 수 없었다.

당시 초등학생 아들이 몸이 아파 병원비를 마련하기 위해 아내가 신문배달을 하는 등 고생을 겪기도 했다.

뒤늦게 학교에 입학한 것은 그러한 컴플렉스 때문이기도 했지만 학교에서 공부를 할 필요성을 절실히 느껴서였다. 서울산업대 금속공예과와 중앙대 예술대학원 문화예술학과를 졸업하고 이번 학기에는 상명대 대학원에서 강의를 하고 있다.

그런 어려움을 딛고 성공할 수 있었던 비결은.
그저 좋아서 미친 열정에 하다보니 여기까지 온 것이다. 정말 개미같이 살았다. 허황된 꿈을 그리며 살았다면 이룰 수 없었을 것이다. 밑바닥에서부터 차근차근 계단을 밟아왔기에 나만의 히스토리가 만들어진 것이라고 생각한다. 또한 故 이경성 관장님 등 많은 분들의 도움이 있었기에 가능했다. 사람은 인생에서 누구를 만나느냐가 중요한데 나는 좋은 사람들을 많이 만나 힘을 얻을 수 있었다.


ⓒ박현수기자

자료만 모으는 것이 아니라 미술계에 따끔한 지적을 해온 것으로 알고 있다.
단순히 자료만 모았다면 지금의 김달진은 없었을 것이다. 자료를 공유화했고, 통계화하고 분석해서 자료의 중요성을 일깨우기 위해 노력했다. 그 점은 여타의 미술평론가들이 하지 못했던 것을 해낸 것이라 자부한다.

또한 미술계에 만연한 다양한 문제점 등을 글을 써서 알렸으며 여러 다양한 분석과 통계를 미술계에 제공하기도 했다. 그 결과 국무총리 산하 한국직업능력개발연구원에서 새로운 직업모델을 창출한 성공사례로 소개되기도 했다.

'서울아트가이드'가 이 정도 성공을 거둘 줄 아무도 예상하지 못했다고 들었다.
처음 팜플렛 형식으로 발간하면서 화랑과 작가들에게 광고를 해달라고 부탁했으나 냉담한 반응을 보였다. 내가 봐도 누가 여기에 광고를 줄까 싶은 마음이 들었다.

하지만 내가 그동안 걸어온 길을 아는 많은 미술인들의 동정심과 신뢰가 바탕이 되면서 점점 가속도가 붙기 시작했다. 지금은 해외전시에 대한 흐름, 미술 전문가들의 칼럼, 미술신간에 대한 폭넓은 정보 등 차별화된 컨텐츠로 사랑받고 있으며 김달진미술연구소의 든든한 수입원이 되고 있다.

국가가 해야할 일들을 개인이 맡아서 하면서 힘에 겨운 점은 없는지.
보람과 긍지도 있지만 이제는 내가 할 수 있는 한계를 넘어선 것들이 너무 많다. 문화부가 공연예술에 비해 상대적으로 시각예술에 소홀한 점이 많은 것 같아 아쉽다.

공연문화의 경우, '대학로문화지도'를 정부가 지원해 무료배포하고 있으며 서울연극센터를 건립해 연극정보를 제공하고 있다. 모두가 정부에서 하고 있는 일들이다.

그런데 미술에 대한 정부 지원은 미약하다. '서울아트가이드'와 미술자료박물관을 한 개인이 만들어 관리하다보니 힘에 버겁고 지친다.

그동안 모은 자료들을 국가 차원에서 데이터베이스화하는 작업도 필요하다. 요즘 세대들에게 인터넷에서 찾을 수 없는 정보는 죽은 정보 아닌가. 그것을 일일히 개인인 내가 할 수는 없는 노릇이다.

많은 미술인들이 인사동에 '한국미술정보센터'가 건립되기를 바라고 있는데.
현재 김달진미술박물관에 방대한 분량의 미술자료들이 있다. 내가 30여년간 모은 자료도 있지만 많은 미술인들이 계속해서 기증하고 있다. 하지만 공간 문제로 기증품을 다 받아줄 수 없는 형편이다.

공간도 협소해 현재 세 군데에 나눠서 보관하고 있다. 자료가 흩어져 있다보니 관리하기도 어렵고 무엇보다 대중의 접근성이 떨어지는 면이 있다.

그래서 미술관이 집중돼 있는 인사동에 '한국미술정보센터'가 건립돼야 한다고 주장하는 것이다. 자료들은 이미 내가 다 수집해놨으니 정부에서 공간만 마련해주면 해결이 된다.

이미 한국미술기록보존소 등 아카이브가 있는데 '한국미술정보센터'는 어떤 차별성이 있는가.
대중과 소통하려면 접근성이 중요하다. 국립현대미술관 자료실도 과천에 있다보니 가기가 힘들고 한국미술기록보존소도 경기도 용인에 있다.

그래서 반드시 인사동에 만들어져야 한다. 또 아카이브의 경우 과거의 것을 보존하고 기록한다는 의미라면, 정보센터는 문화공간이자 참여공간의 성격이다.

과거의 정보도 볼 수 있지만 현재 빠르게 변화하는 전시흐름을 살펴볼 수 있어 대중들의 트랜드에 맞고 대중이 편하게 이용할 수 있는 열린 공간인 것이다.


ⓒ박현수기자
앞으로의 계획은.
앞서 강조했듯이 인사동에 '한국미술정보센터'를 건립하는 것. 또 '대한민국미술인명록' 시리즈를 계속 발간하고 더 나아가 '대한민국미술인명사전'을 만드는 것이다. 미술인명록이 미술인들의 신상정보를 담았다면 미술인명사전은 미술인에 대한 평가까지 담아낼 계획이다.

<오프더레코드 이야기>
김달진 소장은 인터뷰를 마치며 개인적인 바람을 내비쳤다. 그동안 미술에만 오로지 집념하느라 다른 것을 하나도 돌보지 못했다는 것이다. "이제 와 돌이켜 보니 허탈하기도 해요. 가족에게 미안하기도 하고요." 그는 지금이라도 가족과 추억을 만들고 싶다며 쓸쓸한 미소를 지었다. 미술에 대해 이야기할 때의 자신감 넘치던 모습과는 사뭇 다른 모습이었지만 진한 인간미가 묻어나왔다. 순간 미안한 마음이 들었다. 우리가 김달진이라는 개인에게 너무 많은 빚을 진 것 같다는 생각이 들어서다.

문화저널21 배문희 기자 baemoony@mhj21.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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