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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0년 미술자료 수집 열정, 한국작가 4909명 역사로 남겨

관리자

30년 미술자료 수집 열정, 한국작가 4909명 역사로 남겨
[기인열전] 김달진 김달진미술연구소 소장

미술자료 전문가 김달진(55) 김달진미술연구소장이 최근 4909명의 미술인이 담긴 <대한민국 미술인 인명록Ⅰ>을 펴내 화제를 모으고 있다. 우리나라 근ㆍ현대 미술사를 형성하고 발전시킨 미술계 정보를 인명 중심으로 정리해 묶은 자료집이다. 채용신(1850~1941년)부터 현재 활동 중인 사석원(1960~ )까지 1850~1960년에 태어난 50세 이상 작가 4254명과 1970년 이전에 태어난 40세 이상 비창작 분야 인물 655명 등 총 4909명의 출생지ㆍ학력ㆍ전시경력ㆍ사회경력ㆍ상훈ㆍ현직 등 기초 정보를 담았다.

서울 종로구 창성동에서 김달진미술연구소를 운영하고 있는 그를 만나 책을 펴낸 동기와 그가 미술자료 전문가가 되기까지 겪은 이야기를 들었다.

4909명 미술인 정보 담은 인명록 펴내

“이중섭ㆍ박수근ㆍ변관식 등 일부 유명 작가에 관한 자료는 개인화집 등으로 많이 남아 있지만 한국미술사에서 의미 있는 작업을 한 동시대 작가 대부분은 변변한 기록조차 없다. 타계하고 세월이 지나면 잊혀지고 동년배 작가들의 기억 속에만 어렴풋이 남는 거다. 대중이 기억할 수 있는 가이드 구실을 할 수 있는 책, 이 인명록을 출처 삼아 연구자들이 연구할 수 있게 하고 싶었다.”

그가 <대한민국 미술인 인명록Ⅰ>를 펴낸 동기다. 그가 이 작업을 시작한 것은 1979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자료 수집을 진행한 지 30년이 넘어서야 인명록이 빛을 보게 된 셈이다.

“월간 <전시계>라는 잡지사에서 기자로 근무할 때다. 한국 근대 작고 작가들을 연재하며 조사하게 된 것이 인명록 제작의 시초였다. 그후 매일 신문을 체크하고 목록을 만드는 게 일상이 됐다.”

그는 “거의 모든 신문의 부음란을 하루도 빠짐없이 확인했지만 부음란에 나오는 미술인은 극소수의 유명작가 뿐이다. 한국미술협회 지회ㆍ지부, 작가의 출신 대학과 친지 등을 백방으로 수소문해 하나씩 자료를 채워 나가는 작업이 만만치 않았다”고 토로했다. 그렇지만 “이번 인명록을 토대로 대상 작가의 연령을 40대 작가까지로 넓히고 공예ㆍ서예 등 분야로까지 확대, 작품평과 대표작 그림까지 넣어 명실상부한 미술인 인명사전을 만들고 싶다. 인명록 뒤에 ‘Ⅰ’을 붙인 것도 그런 이유”라고 덧붙였다. 그의 열정이 돋보이는 부분이다.

사실 그에게 자료 수집은 그리 낯선 일이 아니다. 아니, 그의 ‘인생’이었다고 해도 지나친 말이 아니다. 어린 시절부터 ‘수집광’이었던 그가 반평생에 걸쳐 해온 일이니 말이다.

학창 시절부터 미술자료 수집 몰두

“성격이 내향적이고 꼼꼼한 편이라 우표ㆍ담뱃갑 등 뭔가 모으고 정리하는 일을 좋아했다. 그러다 중학생 시절 청계천 고서점 거리를 들락날락하며 <주부생활>, <여원> 등 잡지에 한 페이지씩 나오는 명화를 보고 ‘이거다’ 싶은 마음이 들었다.”

서점 주인을 졸라 명화 페이지 한 장만 찢어 10원, 20원에 구입해 한 장 한 장 모으기 시작한 자료가 40년간 모여 이제 무게 18t에 달한다.

“고3 시절 경북궁에서 열렸던 한국 근대미술 60년전을 보고 목표가 확고해졌다. 한국 근현대 작가를 비롯해 근현대 미술사를 살펴볼 수 있는 자료 수집에 열정을 쏟기로….”

1981년 <전시계>에서 일하면서도 자료 수집을 이어온 그는 수집한 자료를 들고 이경성 국립현대미술관장을 무작정 찾아갔다. 지금은 고인이 됐지만 그가 평생 멘토로 삼았던 분이다. 이 관장은 그의 노력에 탄복해 그를 국립현대미술관 자료실의 임시직으로 고용했다. 대학도 나오지 않은 그였지만 미술 자료에서만은 누구에게도 뒤지지 않을 자신이 있었다.

그가 미술계에서 유명세를 치른 것은 당연했다. “걸어다니는 미술사전”, “금요일의 사나이” 등으로 불리며 인맥을 넓혔다. “금요일마다 큰 가방을 둘러메고 인사동 일대 화랑가나 신문사에 들러 최신 자료를 수집하러 다녔기에 그런 별명이 붙었다(웃음).” 자료 수집은 물론 200편에 달하는 기고 등을 통해 미술계에 일침을 가하는 쓴소리를 하는 것도 주저하지 않았다.

그의 이런 노력과 열정은 2001년 김달진미술연구소 설립으로 이어졌다. 1만여 권에 달하는 단행본, 331종 8000여 권의 정기간행물, 400편의 논문, 400편의 미술자료집, 1970년대부터의 주요 미술 기사, 280명 작가의 작품 도판ㆍ기사를 모은 스크랩북…. 나열하자면 끝이 없다. 이 가운데서도 특히 그가 애착을 갖고 있는 자료는 바로 조선총독부 조선미술전람회 도록(1926), 일본인 관학자 세키노 다다시가 쓴 조선미술사(1932), 한국 최초 원색 도판 화집인 오지호ㆍ김주경 2인 화집(1938), 1954년 당시 문교부 장관이 예술가에게 발급하던 문화인증 등이다.

한국미술정보센터 운영의 꿈

그는 땀과 노력이 고스란히 밴, 돈으로 살 수 없는 소중한 자료들을 공유하고 싶은 마음이지만 자꾸만 벽에 부딪힌다. “진열공간이 턱없이 부족하다. 2008년 연구소 내 문을 연 김달진미술자료박물관으론 자료를 모두 소화할 수 없어 현재 고향인 충북 옥천에도 4.5t가량 보관하고 있고 통의동 창고에도 따로 보관 중이다. 물리적 제약으로 인해 모든 자료를 공개하지 못하는 게 안타까울 따름이다.”

그는 한국의 기록문화가 척박한 점을 꼬집으며 “지금까지는 한 개인이 시간과 노력과 애정을 쏟아 이어왔지만 이제 국가가 적극 나서야 할 때”라고 강조했다.

“사설 박물관이다 보니 귀한 자료의 보존처리 문제 등이 쉽지 않다. 서울시ㆍ문화체육관광부 등을 문턱이 닳도록 드나들었지만 가시적 성과가 보이지 않는 부분이라 그런지 지원에는 도통 관심이 없다. 1991년부터 주장해 왔던 건데…. 소중한 자료를 석ㆍ박사, 연구원들이 공유할 수 있도록 하고 싶은데 개인의 노력으로는 한계가 있다. 내가 좋아서 했고 일생을 바쳐 이룬 성과지만, 그로 인해 스스로 족쇄를 차게 된 아이러니한 현실이다.”

그는 2002년부터 발간하고 있는 월간 <서울아트가이드>의 수입으로 8명 직원의 월급과 박물관 운영을 간신히 해결하고 있다. “이번 4월호로 통권 100호가 발간됐다. 접지(摺紙)로 시작한 <서울아트가이드>가 어엿한 한 권의 잡지가 되고 100호가 나오다니 감회가 새롭지만, 앞으로 갈 길이 걱정되는 것도 사실이다. 어느 일정 시점이 되면 공간 부족으로 인해 자료를 처분해야 한다. 몇 년, 몇 십 년 후에 엄청난 가치가 있을 수도 있는 자료가 버려진다고 생각하면 마음이 아플 따름이다.”

그는 스스로를 ‘반쪽 인생’이라고 말한다. 미술 외에는 할 수 있는 일도, 하고 싶은 일도 딱히 없기 때문이다. “한 우물만 파서 전문가가 되고 업적을 쌓는 건 행복하지만, 아침부터 잠들기 전까지 오직 미술 자료에만 매달리는 내 모습이 딱할 때도 있다.”

인사동에 한국미술정보센터를 만들어 보다 넓은 공간에서 체계적으로 미술 자료를 정리ㆍ수집하고 많은 사람들과 공유하고 싶다는 그는 우리나라 현대미술의 위상을 높이는 일을 평생의 소임으로 삼은 듯 보였다. 그에게서 소년 시절 명화를 처음 접했을 때와 다름없는 열정과 호기심이 그대로 묻어나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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