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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걸어 다니는 미술사전’ 김달진

관리자



한국국제교류재단  코리아나 2015년 가을호


강신재(Kang Shin-jae, 姜信哉) / 자유기고가, Freelance Writer  


일찍이 어머니를 잃은 소년이 외로움을 달래며 악착같이 매달렸던 스크랩 작업, 그 작업의 결과는 곧 그의 인생이 되었다. 미술에 관한 자료를 모으고 또 모은 그의 삶은 우리나라 미술계의 역사를 쓰는 과정이었다. 그가 치열하게 매달린 덕분에 우리 미술계의 역사는 눈에 띄게 선명해졌다. 하지만 그는 오늘도 여전히 자료를 모으고 사실을 확인하기에 여념이 없다.

허구한 날 오리고 붙이고 뒤지고 정리하는 작업에 골몰하느라 그 흔한 탁구채 한 번 잡지 못하고 살았다는 그인데. 미술시장이 한창 호황기이던 시절, 부르는 게 값인 작품들을 가까이 두고서도 미술을 돈으로 환산시켜 본 적이 없는 그인데. 적어도 파일 속 작가들은―비록 지취를 느끼지 못할 곳에 있다 할지라도―알 필요가 있다. 당신들의 온전한 역사를 구축하기 위해 불완전한 생으로 남기를 자처한 한 개인의 핍진했던 삶을.

열아홉 소년은 생면부지의 이경성(李慶成, lee Kyung-sung) 당시 홍익대 미술관장을 찾아가 넙죽 큰절을 올렸다. 그러곤 보자기를 풀어 10권의 스크랩북을 내밀었다. 여성 잡지에 컬러로 인쇄된 ‘세계의 명화’, 세계미술전집 화보 등을 오리고 붙여 만든 일종의 ‘스크랩 서양 미술사’였다. 이 관장은 “어린 학생이 기특하다”며 긴장한 그의 등을 토닥였다.

엄마의 부재를 수집으로 채우던 어린 시절
담뱃갑, 우표, 껌 종이 따위로 시작한 수집은 명화 스크랩에 이르렀고, 서양 미술의 역사까지 더듬어 완성한 결과물이 그 스크랩북이었다. 열한 살에 엄마가 돌아가신 뒤 수집으로 결핍을 메우던 그는 내성적이었지만 그렇게 과감하게 행동하기도 했다. 고교를 졸업하고 미술 자료를 본격 수집한 이후에는 잡지사, 미술평론가, 미술관에 무작정 편지를 보내 ‘미술계에 뼈를 묻고 싶은 심정’을 토로하며 미술 자료가 있으면 연락을 달라고 했다. 답을 준 건 당시 한국 문화를 격조 높게 다루던 ≪뿌리 깊은 나무≫ 김형윤 편집장뿐이었다. 격려의 서신에 가슴이 뛰었지만 “취미가 직업으로 이어지기는 힘들 것”이라는 조언에 그는 고개를 떨구었다. 
하지만 그것은 종막이 아니라 서막이었다. 이경성 관장은 얼마 뒤 국립현대미술관장에 임명됐고, 그는 이 관장의 독려로 비록 일당 4500원을 받는 임시직이었지만 국립현대미술관에서 일을 시작했다. 그뿐인가? 취미로 시작한 미술 자료 수집은 45년이나 이어져 중학교 도덕 교과서에 “취미를 직업으로 이은 아키비스트”로 소개되기도 했다. 
우연과 인연이 얽힌 아득한 관계의 망 앞에서 그는 웃었다. 미술계 역사와 동향은 물론 미술인들의 연락처, 인맥, 취향까지 꿰고 있어 ‘걸어 다니는 미술사전’이라 불리는 김달진 (金達鎭 Kim Dal-jin, 60). 이젠 우리나라 근현대미술사의 산증인이자 굴지의 자료 소장가가 되어 버린 그는 전세 사무실을 전전하던 생활을 청산하고 최근 신축 사옥에서 새 돛을 올린 덕분인지 많이 여유로웠다. 
“고3 때 <한국근대미술 60년전(韓國近代美術六十年展)> 전시를 보고 이거다 싶었어요. 박수근, 이중섭, 김환기 같은 유명 작가의 자료는 쉽게 접할 수 있었는데, 그렇지 않은 분들의 자료는 전무했어요. 인쇄된 외국의 명화만 스크랩할 게 아니라 우리 근현대 미술 자료를 모아야겠다 생각했죠.”
김달진 관장은 40여 년 전 당시 구입했던 경복궁 입장권, 전시 티켓, 팸플릿을 찾아 보여 주면서 말했다. 스스로 인생의 전환점이라 평하는 순간의 기록이었다. 막연한 수집에 목적과 방향성이 또렷해졌기 때문이다. 그는 국립현대미술관 자료실에서 약 14년, 가나아트센터 소속 가나미술연구소 자료실장으로 약 6년간 근무했다. 그러다가 2001년 이후에는 자신의 이름을 내건 미술연구소와 미술자료박물관을 차례로 열어 지금껏 운영하고 있다. 

다리품 파는 만큼 쌓이는 자료들
수집은 손보다는 발의 기억이었다. 그는 한때 화랑가에서‘금요일의 사나이’라 불렸다. 금요일마다 인사동과 사간동 일대 화랑을 돌며 팸플릿과 도록을 챙겨 모았던 까닭이다. 매번 엄청난 양의 무게를 짊어지고 다니느라 그의 한쪽 어깨는 아직도 기울어져 있다.
팸플릿, 도록, 입장권, 포스터, 정기간행물, 교과서 등 그의 수집품에는 한계가 없었다. 그래서 모아둔 자료의 양이 20톤에 가까울 때도 있었다. 전셋집 마루가 내려앉아 이웃집 지하실을 황급히 수소문하기도 했고, 안방까지 치고 들어온 박스 더미 위에 매트리스를 올려놓고 자던 시절도 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미술 자료는 그에게 늘 갈증이었다. 희귀 아카이브에 대한 갈증도 날이 갈수록 더해졌다. 취미 예술품 등을 주로 취급하는 코베이 경매에 그가 매달 참여하는 이유다. 가장 애착이 가는 소장품 중 하나인 《서화협회회보(書畵協會會報) Journal of the Calligraphy and Painting Association》 2권도 경매를 통해 얻었다. 우리나라 최초의 미술 잡지로 1921년, 1922년에 발간된 책이다. “보자마자 두근거렸어요. 아내에게 내가 저건 ‘딸라 빚’을 내서라도 내 손에 넣고 싶다고 말했죠. 얼마에 낙찰 받았는지 지금도 내 입으론 말 못해요. 문화재로 지정될 수도 있을 만큼 귀한 책이에요. 김소월 시집 《진달래꽃》초판본이 문화재로 등록된 것처럼.”
그는 인터뷰 중에 특정 자료가 언급될 때마다 그것을 찾아와 눈앞에 펼치곤 했다. 마치 자료에 근거하지 않은 발화는 인정할 수 없다는 태도 같았다. 어떤 일의 발생 연도나 구체적 수치를 얼버무리는 일도 없었다. 질문을 곱씹었고, 그렇게 내어놓는 답엔 그가 원하는 기사의 궤도가 묻어났다. ‘수집가’에서 ‘기록자’로 화제가 돌아간 건 우연이 아니었다.

수집가에서 기록가, 연구가로
그의 첫 직장은 잡지사였다. 1978~80년 미술잡지 ≪월간 전시계(月刊展示界)≫ 기자로 근무하며 미술 자료를 글로 정리하는 작업을 했다. 기자 생활을 끝내고 자료실에서 근무할 때도 글쓰기를 지속했다. “1985년에 ‘관람객은 속고 있다―정확한 기록과 자료 보존을 위한 제언”이라는 제목으로 글을 발표했어요. 작가 약력, 연보, 연감 등에서 오류, 오기, 누락이 발생한 사례를 들며 그 심각성을 환기시켰죠. 예를 들어 1983년 전시회 기록이 《한국예술지(韓國藝術志)》에는 1,272건, 《문예연감(文藝年鑑, Culture and Art Yearbook)》 1,695건, 《한국미술연감(韓國美術年鑑, Korea Art Annual)》 1,775건, 《열화당미술연감(悅話堂美術年鑑, Yeolhwadang Art Almanac)》 2,005건으로 차이가 난다는 것을 밝혔어요. 잘못된 역사적 사실들이 확대 재생산되는 게 개인적으로 안타까웠는데, 많은 언론에서 이를 인용 보도하게 되면서 사회적으로 이슈가 됐죠. 이후에도 글을 발표해서 화제가 되는 경우가 종종 있었어요. 소위 뉴스메이커였죠.”
그러나 그는 글을 쓰면 쓸수록 목이 말랐다. 지식의 양, 자료의 이해도와 무관하게 그는 학벌 중심 사회에서 고군분투하는 고졸 사회인일 뿐이었다. 결국 두 번의 낙방 끝에 34살에 늦깎이 대학생이 되었다. 내친 김에 석사 학위까지 취득했다. 


김달진미술연구소(金達鎭美術硏究所, Kimdaljin Art Research and Consulting)와 김달진미술자료박물관(金達鎭美術資料博物館, Kimdaljin Art Archives and Museum)을 운영하기 시작한 이후에는 축적된 자료의 활용 방안을 적극적으로 고민했다. 그 결과 미술계 뉴스와 읽을거리를 망라하는 무가지 형태의 미술정보잡지인 서울아트가이드를 제작하고 있고, 잡지의 확장 형태인 달진닷컴 운영에 이어 SNS을 통해 미술 정보를 빠르게 유통시키는 역할까지 맡았다. 
그는 거기서 만족하지 않았다. “수집을 하다 보면 당연히 정리가 따르고 정리를 하다 보면 이걸 공적 가치를 지닌 대상으로 어떻게 확대 재생산할 것인가를 고민하게 되죠. 그게 수반되지 않으면 진정한 의미의 수집이라고 할 수 없어요. 이것 좀 보세요. 덕수궁미술관에서 열린 <벨기에 현대미술전(白耳義現代美術展, Exposition D’Art Moderne Belge)> 팸플릿이에요. 놀랍게도 개최 시기가 1952년입니다. 한국전쟁 중에 외국 것을 들여와 전시를 해? 상식적으로 납득이 안 가지만 사실이었죠. 팸플릿이 내 손에 들어오지 않았더라면 사실여부를 확인할 생각도 못했겠지요. 이런 경험을 계기로 <외국미술 국내전시 60년(Exhibitions of Foreign Arts in Korea 1950-2011)>이라는 전시를 기획하고 단행본까지 내게 된 거죠.” 


분석 정리 작업은 언제나 전시나 단행본의 형태로 끝을 본다. 그동안 《미술정기간행물(美術定期刊行物, Exhibition of Regular Publications about Korean Art) 1921-2008》, 《한국현대미술 해외진출 60년(韓國現代美術海外進出六十年, Oversea Exhibitions of Contemporary Art of Korea 1950-2010)》) 《한국미술단체 100년(韓國美術團體百年, Korean Art Groups 20th Century’s Topology)》, 《한국근현대미술교과서(韓國近現代美術敎科書, An Overview of Korean Modern Art Textbooks)》, 《한국미술공모전의 역사(韓國美術公募展의 歷史, A History of Art Competitions)》 등의 단행본을 펴냈다. 이런 성과로 2014년 김세중기념사업회가 주는 한국미술저작출판상도 수상했다. 미술계 기초 자료 구축을 위해 《대한민국미술인인명록(大韓民國美術人人名錄, Who’s Who in Korean Art 1》, 《한국미술단체자료집(韓國美術團體資料集) Korean Art Groups 1945~1999》 등을 내기도 했다. 2013년 한국아트아카이브협회를 창설, 이끌고 있는 것도 그 연장선상이다. 
치밀한 분석과 날카로운 점검 없이는 완료할 수 없는 작업들. 45년간 수많은 글자와 그림과 숫자들을 추리고 걸렀을, 그래서 미로에 단련된 듯한 그의 눈을 다시 들여다봤다. “어떤 기자가 오류, 오기를 끈질기게 지적하는 날 보고 너무 편집광적으로 그러는 게 아니냐 묻더라고요. 내 눈에는 그게 금세 눈에 띄어서 그냥 넘어가기 힘들다 했죠. 오늘의 정확한 기록이 내일의 정확한 역사로 남으니까요. 앞으로 미술계에 일어날 일들의 단초가 ‘오늘 내 가방 속 작은 전시 리플릿 한 장, 메모 한 줄’이라는 생각은 변함이 없어요.”
결연한 얼굴의 그가 서가의 작가 개인 파일을 소개하기 시작한다. 우리나라 근대 작가 중 270명을 선정해 그들 관련 자료를 인물별로 망라해 정리한 개인 스크랩북이다. ‘그의 가방 속에 들어 있던 작은 전시 리플릿, 메모 한 줄’이 모여 작가들의 삶을 촘촘히 구성하고 있었다. 
문득 생각했다. 이 사람의 이 촘촘한 삶은 과연 누가 기록해 줄 것인가. 허구한 날 오리고 붙이고 뒤지고 정리하는 작업에 골몰하느라 그 흔한 탁구채 한 번 잡지 못하고 살았다는 그인데. 미술시장이 한창 호황기이던 시절, 부르는 게 값인 작품들을 가까이 두고서도 미술을 돈으로 환산시켜 본 적이 없는 그인데. 적어도 파일 속 작가들은―비록 지취를 느끼지 못할 곳에 있다 할지라도―알 필요가 있다. 당신들의 온전한 역사를 구축하기 위해 불완전한 생으로 남기를 자처한 한 개인의 핍진했던 삶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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